8화. 야단법석 꼬맹이
영서는 전화를 걸까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5년 전에 그 사고가 있은 후부터 영서는 아이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을 뿐더러, 아이를 꺼리기까지 했다. 아이들을 볼 때마다 잊고 싶은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잊고 싶으나 잊을 수 없고, 잊으려 해도 차마 잊혀 지지 않는. 사고와 함께 떠나보내야만 했던, 작고 사랑스러운 자신의 아이가.
영서에게 아이는 가장 따뜻한 희망이자 가장 더러운 과거의 상징이었다. 그 시절이 영서에게 남긴 건, 그저 기억이라 포장된 고통일 뿐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이 아이에게 만큼은 전혀 불편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친해지고 싶고,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찹쌀떡 같은 그 아이, 민우가 무척이나 좋았다.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을 만큼. 이상한 일이었다.
“여보세요.”
상대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전화를 받은 사람이 민우임을 확신한 영서가 작게 웃었다.
“민우 맞지? 미안해……. 누나가 너무 바빠서 전화한다는 걸 깜빡했지 뭐야.”
민우는 맑은 눈망울만 기쁘게 깜빡였고, 영서는 혼잣말을 계속 이어갔다.
“뭐 좀 먹었어? 너무 말랐던데……. 앞으로는 좀 더 많이 먹자, 알았지? 어린이는 편식을 해서는 안 돼. 편식하면 키도 안 크고, 튼튼해지지도 않으니까. 게다가 어린이라면 좀 통통한 편이 더 귀엽거든! 물론 우리 민우는 지금도 충분히 귀엽지만⋯⋯. 아 맞다! 나 방금 TV에서 너희 아빠 봤어. 엄청 대단한 일을 해내신 것 같던데? 누나 대신 꼭 축하한다고 전해줘!”
* * *
10분 뒤, 전화를 끊은 민우는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자신의 칠판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그 위에 슥슥 뭔가를 적어 내려갔다.
-Congratulations!
아이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한글과 영어는 어느 정도 쓸 줄 알았고, 한글보다는 영어를 쓰는 걸 더 좋아했다.
그러나 뭔가를 써서 표현한 것은 굉장히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동안은 소통에 대한 욕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에 노부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민우가 한영서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미 알고 있던 지훈만이 그들보다는 크게 놀라지 않고 있었다.
한편, 핸드폰에서 흘러나온 영서의 어렴풋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시혁은 칠판에 쓰여진 민우의 글씨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내, 따뜻한 손이 다가와 민우의 머리를 살포시 쓰다듬었다.
“고마워.”
민우는 글을 다 쓴 뒤, 사뭇 진지한 얼굴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평소에 가장 싫어했던 당근까지 열심히 먹었다.
이에 노부부는 한 번 더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허허, 이 녀석. 기특하구나!”
한참이 지난 뒤에야 시혁의 아버지가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귀여운 손자가 먼저 나서서 글도 쓰고, 밥도 먹고, 심지어는 싫어하는 당근까지 먹다니! 겨우 정신을 차린 시혁의 어머니가 다급히 물었다.
“지훈아, 방금 그 아가씨가 우리 민우한테 대체 뭐라고 한 거니?”
곁에 있는 시혁의 아버지 역시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별말 안 했어요. 편식하지 말고 밥 많이 먹으라고 하던데요. 자기 대신해서 형한테 축하해달라고도 했고요.”
지훈의 말에 시혁의 어머니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되물었다.
“그게 끝이야?”
“또 무슨 말을 더 하겠어요?”
곁에 있던 시혁의 아버지가 흔히 볼 수 없는 만족스런 얼굴을 했다.
“그 아가씨 전화 한 통이 정신과 의사의 1년 치료보다 더 낫구나.”
“그러게나 말이에요! 그 아가씨 정말 괜찮은 아가씨구나. 시혁아, 꼭 잡아라!”
“예.”
시혁의 어머니는 계속해서 짧은 답만 내놓는 시혁을 못마땅하다는 듯 잠시 흘겨보더니, 이내 지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훈아. 네 형 같은 목석이 어디 여자랑 만나는 법을 잘 알겠니? 네가 잘 도와야 한다, 응?”
“이제야 제 쓸모를 아셨군요! 걱정 마세요. 제 평생을 들여서라도 형을 확실히 교육 시킬 테니까! 대신 약속하세요. 두 분은 절대로 이 일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이 단계에서 어른들이 끼어들었다가는 곧장 파투난다고요!”
“알겠어. 그냥 물어보는 것뿐이잖니!”
* * *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부모님이 떠나자, 지훈은 허세 가득한 얼굴로 시혁을 바라보았다.
“형, 나 잘했지? 어땠어?”
시혁은 아무 말 없이 손에 들고 있던 뭔가를 휙 던졌다. 그러자 지훈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척 받아내었다.
“이게 뭐야?”
그러나 답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손에 들린 것을 본 순간 지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 키였다. 그것도 그가 아주 오랫동안 탐내왔던, 전 세계 단 한 대뿐인, 백 주년 기념 한정판 부가티 스포츠카!
“아유, 고마워라! 형! 사랑해!”
지훈은 차 키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아무리 애원을 해도 시혁은 눈썹 하나 꼼짝하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지훈은 부모님 앞에서 몇 마디 거들었다고 그가 흔쾌히 차를 내어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한영서에 대한 형의 마음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모양이었다. 순간 조심스레 걱정이 일었다.
“근데 형. 정말이야? 그냥 만나는 것도 아니고, 진짜 결혼하겠다고?”
“응.”
시혁의 말투는 단호했고, 일말의 여지도 없었다. 곧이어 지훈의 한숨이 길게 이어졌다.
“그럼 충고 하나 하겠는데,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여자의 마음을 얻는 건 일종의 게임이라고 할 수 있지. 난이도에 따라 등급이 나뉘거든. 이지 모드, 노멀 모드, 하드 모드, 그리고 헬 모드. 그중에서도 한영서씨는 단연 헬 모드야, 헬! 모! 드!
사람한테는 누구나 약점이 있어. 하지만 한영서씨를 봐. 돈? 딱 보면 알겠지만 금전적인 도움 따위 통할 리가 없을 거야.
한영서에 대한 업계 평판, 최악까진 아니겠지만 썩 좋지도 않아. 근데 일부러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은 이상, 돈을 받을 리가 있을까?
감정? 한영서씨가 외국에서 얼마나 많은 남자를 만났는지 알지? 소문에는 연예계에도 전 남친이 수없이 많대. 게다가 다들 한 가닥씩 하는 사람들이라고. 나도 그때 명단 한 번 받아본 적 있는데, 완전 기겁했잖아. 연애고수를 논하자면 나도 어지간하면 꿀리지 않는데도 말이지!
그리고 형, 덜컥 아기부터 가질 생각은 아니지? 그렇게 해서 결혼할 생각은 진짜 하지도 마. 한영서씨는 일에 대한 욕심이 대단한 사람이야. 어쨌든 전문가인 내가 직접 나서도 게임오버 될 가능성이 80퍼센트 이상인데, 목석같은 형이 나선다? 거의 불가능이라고 봐야지.”
“100퍼센트.”
시혁의 냉랭한 답에 지훈은 입술을 살짝 뒤틀었다.
“그래, 그래. 난 100퍼센트 게임오버야. 그런 디테일한 부분은 그냥 넘어가자고, 오케이? 어쨌든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자면, 한영서씨는 나와 같은 철저한 비혼주의자가 분명해. 이런 사람들은 감정이나 관계에 완전히 시니컬하고, 자유를 목숨처럼 여겨. 만약 형이 이런 여자랑 그냥 한번 만나고 싶다면야 이지 모드인데, 결혼을 하겠다? 그건 진짜 헬 모드야.”
“그건 네가 결혼하고 싶거나 함께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은 사람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야.”
창문을 통해 쏟아지듯 들어온 달빛이 시혁의 얼굴을 유유히 비춰주었다. 평소보다도 훨씬 부드럽고 따뜻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지훈은 대화를 하는 동안, 형이 뱉은 말의 음절수를 세는 동시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라라, 역시 사랑에 빠진 사람은 다르네. 감정이라고는 티스푼만큼도 없는 사람이 날 가르치려 들다니! 이야, 그래도 형이 한 말에 대해서는 인정 안할 수가 없네. 어때, 내가 도와줘?”
“됐어.”
이번에도 역시 짧은 답이 흘러나왔다. 시혁의 태도에 조급해진 건 오히려 지훈이었다.
“됐긴 뭐가! 여자를 사귀는 건 형이 잘하는 협상이나 사업과는 전혀 다르다니까? 생각 좀 잘 해봐. 정말 이 똑똑하고 유능한 연애 고수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지훈이 자기 어필에 심혈을 기울이던 그때, 두 사람이 자리한 서재의 문이 끽하고 열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그쪽을 돌아보자, 문가에 잠옷 차림의 민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곧이어 시혁의 깊은 눈동자에 약간의 의아함이 어렸다.
“엇, 꼬맹아⋯⋯.”
지훈 역시 놀란 눈치였다. 꼬맹이가 어째서 이 시간에 제 침실이 아닌 다른 곳에 온 거지?
* * *
조용한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 민우는 평소에도 밥을 다 먹고 나면 곧장 방으로 돌아갔다.
집안의 고용인들 역시 각자 할 일을 마친 뒤에는 바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또한 밖으로 나와서도, 어떤 큰 소리를 내서도 안 되었다. 꼬맹이의 심기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또 폭주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시혁의 어머니가 밥을 잘 먹지 않은 민우를 걱정해 방으로 간식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불편했던 민우는 다락방 문을 잠근 채, 한동안 스스로를 가둬버린 적도 있었다. 이에 노부부는 민우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아끼면서도, 시혁과 지훈이 사는 이 집에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예민한 민우가 어쩐 일로 밖에 나온 것일까? 뿐만 아니라 민우는 곧장 시혁을 향해 달려와서 그의 다리를 끌어안기까지 했다. 그 모습에 지훈이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꼬맹아, 뭐 하는 거야? 바짓가랑이 잡고 늘어지기?”
고개를 숙여 민우를 바라보다 무엇을 원하는지 단박에 간파한 시혁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히 말했다.
“안 돼, 어젯밤에 다녀왔잖아.”
그러자 민우의 시선이 시혁의 핸드폰에 닿았다.
“전화는 저녁 먹을 때 했고.”
시혁이 재차 민우의 요구를 거절했고, 곁에 있던 지훈은 이제야 민우의 의중을 깨달았다.
‘한영서씨가 보고 싶은 모양이네.’
아무것도 통하지 않자 터벅터벅 지훈에게로 향한 민우는 좀 전에 아빠 시혁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삼촌 지훈의 다리에 매달렸다. 이윽고 지훈은 조카의 행동에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 안 돼. 이런 필살기까지 쓰면 어떡해. 삼촌은 우리 꼬맹이의 귀여움에 사족을 못 쓴다는 거 잘 알면서!”
평소에는 뚱한 표정만 짓는 민우가 뭔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짓는 표정과 태도는 그야말로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민우의 눈이 별빛을 담뿍 담은 듯 맑게 반짝이면, 밤하늘의 달이라도 따다 주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그 눈빛에 대항할 수 있는 건 오직 시혁 뿐이었다.
“꼬맹아, 나한테 아양을 떨어도 소용없어. 삼촌은 네 아빠한테는 못 이기거든!”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민우는 꼭 끌어안았던 지훈의 다리에서 홱 떨어졌다. 상황판단이 참 빠른 아이였다.
이후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 생이별을 한 듯 풀죽은 민우의 표정에 지훈은 벽까지 짚은 채 웃음을 터뜨렸다.
“아, 꼬맹아, 너무 급하게 굴지 마. 그런 말도 있잖아,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면 밤낮 같이 있지 않아도 된다. 앞으로 네 아빠가 영서 누나랑 결혼하게 되면 매일이라도 볼 수 있을 텐데, 뭐.”
그러나 지훈의 말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민우는 더 화가 난 듯 발을 쿵쿵 구르며 서재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윽고 지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어떡하지?”
“오늘 저녁은 든든히 먹었으니 괜찮아.”
당분간은 민우가 단식 투쟁을 해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지훈은 형의 말을 듣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그들은 민우를 얕잡아 봐도 한참 얕잡아봤다. 아이에겐 본래 그 어떤 술수도 필요치 않았다. 민우의 세상에 깊게 새겨진 진리는 그저 난리만 치면 모든 게 만사오케이라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혁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래층 거실에서 쾅하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훈과 시혁은 서로를 마주 보다가 앞 다퉈 아래층으로 달려갔다.
쨍그랑!
와장창.
겨우 한순간일 뿐이었는데 아래층 거실은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 구석에 놓여있던 사람 키만 한 골동품 화병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고, 쓰러뜨릴 수 있는 것은 모두 쓰러져 있었으며, 망가뜨릴 수 있는 것은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유민우!”
굉장히 화가 났을 때만 나오는 아이의 이름 세 글자가 시혁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 위압감에 지훈조차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민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시혁의 무서운 얼굴에 덜덜 떨던 민우는 격해진 감정에 악을 쓰면서, 깨뜨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전부 집어 던지는 동시에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내 시혁이 얼른 그 뒤를 쫓았지만 빠르게 달릴 수는 없었다. 바닥에는 유리 조각이 가득 널려있어서 자칫 발을 잘못 디뎠다가는 크게 다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