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의 마법사
제14화
14화. 노팅엄 대학병원
이혁은 계속 안을 들여다보았다. 보이어는 캐비닛에서 빨간 목도리를 꺼내 들고 있었다. 워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 그러나 이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단 보라는 듯 안쪽을 가리킬 뿐이었다.
그 빨간 목도리 역시 팬들이 던지고 간 것 중 하나였다. 보이어는 목도리에 있는 먼지를 꼼꼼히 턴 뒤, 도슨이 했던 것처럼 높이 들어 올려 불빛에 비춰보았다. 이때 이혁이 워커의 어깨를 치며 손짓했다.
두 사람은 조용히 몸을 돌려 걸어 나왔다.
“워커, 번스의 술집이나 갈래요? 제가 사죠.”
“좋아요. 그런데 어쩌다 감독님이 갑자기 술을 즐기게 됐어요? 이상하네요.”
“왜요, 뭐 문제 있어요?”
“아닙니다, 전 지금 감독님이 더 좋은 걸요!”
* * *
잠에서 깬 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인상을 쓰며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어제 저녁, 워커와 함께 번스의 술집에서 진탕 마신 것이 원인이었다.
그는 일어나 씻고 옷을 갈아 입었다. 그는 자신이 노팅엄 포레스트의 감독이라는 것, 한국인에서 영국인이 된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간단한 아침 식사를 차린 후, 문 앞에 배달된 신문을 가져와 펼쳤다.
그는 신문의 스포츠면을 보았다. 어제의 경기에 관한 기사가 맨 위에 있었다. 이 신문은 노팅엄 일보였기 때문에 노팅엄 포레스트의 경기 소식을 가장 먼저 다루는 건 당연했다.
이혁은 기사를 읽어보았다. 기본적으로 우호적인 논조였다. 비록 지기는 했지만 어제 경기는 경이로웠으며 감독 역시 대단했다는 것이었다. 이혁은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좋은 내용만 적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자들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팬들이 라커룸에 들어왔던 사실도 알리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감독이 선수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한 행동이므로 문제가 없고, 경기를 통해 그 성과를 증명했으므로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입장도 있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어쨌건 감독이 책임감이 없었다고 비난했다. 라커룸은 신성한 공간이고 어떤 이유건 간에 팬들을 라커룸으로 들인 행위는 결코 허용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혁은 냉소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라커룸은 전혀 신성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들이 직접 어제 하프 타임에 노팅엄 포레스트의 라커룸을 봤더라면 결코 신성하다는 등의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신문을 계속 읽었다. 한 기사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보는 순간 누가 뒤통수를 한 대 때린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농락당했다!>
어제 기자회견에서의 이혁의 모습이 기사 하단을 장식했다. 그의 얼굴이 신문에 난 것이다. 기사에서는 주심의 두 번의 판정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로니 감독은 자신이 팀이 심판과 축구협회에 농락당했다고 생각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축구협회에 대해 나쁜 말을 한 적은 없는데?”
‘경기가 끝나고 다시 그 장면을 돌려보았을 때, 두 번의 판정은 모두 억지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마지막의 오프사이드 판정은 그렇다 쳐도 도슨의 골이 반칙으로 무효 판정이 난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축구협회에서 심판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존 베이커에게 문의해 보았지만, 그는 아직 영상 분석 중이므로 어떠한 답변도 할 수 없다고 할 뿐이었고 농락이라는 단어의 선택은 적절치 못했다고만 덧붙였다. 또한, 해당 경기의 주심이었던 윈터에게도 판정에 대해 질문했으나 그는 판정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만 견지할 뿐이었다…….’
이혁은 하품을 하며 신문을 한쪽으로 밀어버렸다. 이걸 계속 읽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그에겐 오전 내로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도 있었다.
* * *
40분이 지난 후, 그는 노팅엄 대학병원의 정문에 서 있었다. 이곳은 6층 높이의 큰 건물이었고 정문의 양쪽으로는 두 개의 사자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왠지 이 병원은 병원이라기보다는 중세 유럽의 비밀스러운 수도원처럼 느껴졌다.
중요한 일이란 바로 병원에서 뇌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었다. 자신이 로니 감독의 몸으로 들어간 사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상태가 정상인지, 또한 후유증 같은 게 있는 건 아닌지 정확한 진단을 받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혁은 가장 권위 있는 병원에서 검사를 받기로 한 것이었다. 이 병원은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을 담당한 적이 있었다. 상당한 수준을 자랑하는 병원임은 분명했다.
이혁은 정원을 가로질러 로비로 들어갔다. 접수대로 가서 접수원에게 말을 걸었다.
“머리 검사를 좀 받고 싶은데……. 이 병원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전문의에게 말이에요.”
이혁은 그 스스로도 자신이 어디가 아픈 것인지, 아픈 게 맞긴 한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머리에 관한 검사를 받고 싶었다.
“예약하셨나요?”
“아뇨, 예약은 안 했어요.”
접수원이 고개를 들어 이혁을 쳐다봤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접수원은 곧장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콘스탄틴 교수님, 여기 환자 한 분이 오셨는데요…….”
그 뒤로는 뭐라 말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이혁은 로비 쪽을 보며 그녀가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렸다.
“4층 415호로 가시면 됩니다. 콘스탄틴 교수님이 거기서 기다리고 계실 거에요.”
접수원은 예약 번호가 적힌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혁은 종이를 건네 받은 뒤, 몸을 돌려 걸어갔다. 접수원은 그가 지나간 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신문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 신문은 노팅엄 일보였으며, 그녀가 보고 있는 면에는 <우리는 농락당했다!> 라는 기사 제목이 있었고 그 밑에 바로 이혁의 사진이 있었다.
* * *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도착한 이혁은 금방 415호를 찾을 수 있었다. 노크하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어수선한 사무용 책상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그의 시선을 끈 것은 컴퓨터 뒤에서 정신 없이 일하고 있는 50세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안경 너머로 비치는 이혁을 실눈을 뜨고 쳐다봤다.
“로니씨?”
“절 아세요?”
이혁의 물음에 남자는 컴퓨터 옆에 놓인 신문을 들어 보였다. 오늘로 몇 번째 보는 건지 모르겠다.
그가 한숨을 쉬자 남자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전화로 들었습니다. 노팅엄 포레스트 감독인 것 같은 환자가 왔다고요. 솔직히 리스 부인이 잘못 본 줄로만 생각했지만……. 그녀는 노팅엄 포레스트의 경기를 보지 않거든요.”
이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여자이니…….”
“아닙니다. 그녀는 노츠 카운티의 열렬한 팬이기 때문이죠.”
그가 의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단 앉으시죠.”
자리에 앉자 콘스탄틴이 그에게 말했다.
“사실 로니 감독님이 절 찾아온 이유, 대충 알 것 같습니다.”
“네?”
콘스탄틴은 책상에 쌓아놓은 수많은 서류 더미 속에서 신문 하나를 꺼내 들었다. 거기에는 쓰러진 자신의 모습이 대문짝만 하게 실려 있었다. 이혁은 한숨을 또 쉴 수밖에 없었다.
“맞습니다. 이쪽을 부딪쳤는데…….”
그는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때 이후로 제가 이전의 저와는 너무 달라진 것 같아서요. 마치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에요.”
그 말에 콘스탄틴은 책상 모서리에 몸을 기대며 흥미로운 듯 이혁을 살펴보았다.
“정확히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음……. 예전의 저는 일단 술 담배를 멀리했어요. 정말 규칙적이고 엄격한 생활을 해왔습니다. 과묵하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편이었고요…….”
이혁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로니 감독의 모습과 성격, 생활 습관 등을 얘기했다.
“코치의 말에 따르면 전 거의 수도승과 마찬가지인 생활을 했다고 하더군요. 물론 스스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확실히 틀에 박힌 생활을 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당신은 열정적이고 활발하고, 외향적이 됐고 생활 습관도 예전처럼 엄격하지는 않고, 가끔 욕도 하고, 충동적일 때도 있고……. 그냥 예전과는 완전 반대로 변했지요?”
콘스탄틴은 이혁의 설명에 살을 덧붙였다.
“네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죠?”
“당신의 언행을 통해 알 수 있는 부분이죠. 음 비슷한 사례를 들은 적이 있는데……. 큰 충격을 받고 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경우가 있어요. 그 사람은 아주 멀리의 도로명이 갑자기 기억나고 배우지도 않은 타국의 언어도 유창하게 구사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뭐, 이건 그저 소문일 뿐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은 아닙니다.”
콘스탄틴 교수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혁을 향해 손짓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일단 검사를 한번 해봐야겠습니다.”
* * *
30분이 지난 뒤, 이혁과 콘스탄틴은 다시 415호로 돌아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검사 결과를 보면 딱히 문제가 있는 부분은 없네요. 어떤 충격도 받은 적이 없는 것처럼 보여요. 아주 정상적으로 건강합니다.”
콘스탄틴은 분석표를 이혁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물론, 이건 간단한 분석 결과일 뿐이니 지속적으로 관찰할 것을 추천 드립니다.”
이혁은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건 힘듭니다. 일도 해야 하고…….”
“걱정하지 마세요. 입원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루씩 날을 정해서 검사를 꾸준히 진행하자는 것이니까요.”
“흠, 그렇군요.”
“당신을 자주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감독님의 생활 전반을 관찰할 수 있다면 더 좋겠죠. 훈련이나 경기도 포함해서 말이에요.”
이혁은 그 말을 듣자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공짜로 경기를 보려고 그러시는 것은 아니죠?”
“아니, 감독님! 의사의 직업 정신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그는 갑자기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뭐, 그런 건 아니지만……. 하지만 훈련 내용이 흘러나갈 우려도 있고요. 저희 팀의 내부 소식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말입니다.”
콘스탄틴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전 3대째 노팅엄 포레스트의 팬입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이혁은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전 어디 아픈 게 아닙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제가 여기 온 것은 단지 확인을 위해서였고 당신 역시 제가 매우 정상적이고 괜찮다고 했으니 굳이 신경과 의사를 곁에 둬서 제 머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동네방네 알릴 생각은 없습니다.”
“로니 감독님, 하지만 이건 아주 기초적인 검사였고 이것만으로는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콘스탄틴은 다소 조급해진 듯했다.
“그럼 이렇게 하죠. 훈련 시간에 오시는 것은 허락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경기 중에 벤치까지 오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 관람석 쪽에 좋은 자리를 하나 마련해 드리죠. 그리고 훈련 시간도 마음대로 오실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오시기 전에 반드시 연락하셔야 합니다.”
“일반적인 관람석은 안됩니다. 거긴 너무 시끄러워서 제가 일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그는 일이라는 단어를 특히 힘주어 말했다.
“프리미엄 석으로 해주시는 게 좋겠군요.”
이쯤 되자 이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바라는 게 뭐 이리 많아?’
그러나 없던 일로 하자고 하기에는 이혁 역시 지금 자기 상태가 좀 찜찜한 건 사실이었다. 그는 일단 이렇게 말했다.
“그건 아마 구단주와 상의해봐야 할 것 같네요.”
이혁이 말을 끝내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 데겔티 구단주에게서 온 전화였다.
“죄송합니다, 잠시 전화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