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의 마법사
제15화
15화. 콘스탄틴 교수
콘스탄틴과 대화를 하다 데겔티에게서 전화가 와 이혁은 문을 나선 다음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
전화 너머로 데겔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니, 아직 어제의 경기에 대해 축하를 못한 것이 생각나서 말이야. 비록 지긴 했지만 정말 대단했어!”
“감사합니다. 사실 이겼어야 할 경기인데요.”
“아냐, 아냐. 정말 잘했어! 어제 하프 타임에 보였던 지도력도 대단했고! 하지만 그래도 라커룸은 특수한 장소이니 마음대로 팬들을 들어가게 해서는 안 돼. 그건 축구계의 오랜 전통이니. 게다가 우리 팀은 영국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팀이기도 하니까 더더욱 전통을 지켜야 하지.”
“네, 명심하겠습니다.”
데겔티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어제 경기는 정말 대단했어. 그런 경기는 정말 오랜만이었지! 계속 감독을 맡겨도 좋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더군. 난 아무 간섭도 하지 않을 것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네!”
“감사합니다 구단주님.”
이혁은 순간 콘스탄틴이 내건 조건이 떠올랐다. 그는 그 일에 대해 데겔티에게 설명을 한 뒤, 그의 의견을 구했다.
“로니, 당신은 우리 팀의 감독이야. 나를 제외하고는 당신이 가장 높은 사람이지. 감독은 모든 일을 결정할 권한이 있으니 앞으로 이런 건 물어보지 않고, 일을 진행하도록 하게.”
전적으로 자신을 믿는다는 데겔티의 말에 이혁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는 재차 감사 인사를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콘스탄틴의 모습이 보였다. 이혁은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좋습니다. 당신이 해달라는 대로 해 드리겠습니다. 이번 시즌 홈 구장의 프리미엄석 말이에요.”
그 말을 들은 콘스탄틴 교수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저도 내걸 조건이 있습니다.”
이혁은 그에게 물었다.
“여기가 영국 최고의 병원이 맞습니까?”
콘스탄틴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최고라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데에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좋아요. 현재 저희 팀에 팀 닥터는 고작 두 명뿐이거든요. 그런데 여긴 의사가 많으니……. 저희에게 몇 명의 의사를 소개해 주세요.”
“그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널리고 널린 게 수련의이니 마음대로 고르세요.”
이혁은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아뇨, 전 경력이 적은 의사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만약 그들이 실수라도 하게 된다면 부상을 입은 선수들은 어떡합니까? 제가 필요한 것은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의사입니다. 재활 전문가라면 더욱 좋고요.”
그 말에 콘스탄틴은 눈썹을 씰룩였다.
이혁은 그의 표정 변화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만약 힘드시다면 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죠.”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잠시만요……. 얼마 전에 은퇴한 노의사들이 몇 있는데 어쩌면 한다고 나설지도…….”
“전문가인가요?”
“그럼요! 제가 보장할 수 있습니다. 다들 전문가이고 풍부한 실전 경험도 있죠. 공부만 많이 한 교수들보다 훨씬 귀한 인력들이죠.
콘스탄틴은 단호했다.
“그들과 연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다들 저와 오랜 친구들이기 때문에 기쁘게 이 일을 받아들일 겁니다.”
이혁은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죠, 콘스탄틴 교수님.”
그는 손을 내밀었다.
콘스탄틴 역시 손을 뻗어 이혁의 손을 맞잡았다.
“어째 된통 당하는 느낌이 들지만……. 앞으로 잘해봅시다.”
데겔티가 자신에게 결정권을 주었으니 이혁은 기쁘게 그 권한을 쓰기로 했다. 그는 노팅엄 포레스트의 감독으로서 제대로 일해보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일단 다음 시즌에도 감독으로 남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방면에서 완벽함을 추구해야 했다. 부상 관리도 그 중 하나였다. 이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시즌의 성패가 갈릴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우수한 의사가 필요했다. 의사의 실력이 좋다면 선수의 부상 확률을 낮출 수 있고 부상 선수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그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간단한 계약서를 쓴 뒤, 악수를 했다.
콘스탄틴 교수는 이혁을 아래층까지 배웅했다.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며 정문으로 향했다. 거의 도착했을 때, 그들은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문밖에 수많은 기자들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충 세어봐도 열 명이 넘었다.
“아니, 이건…….”
이혁은 잉글랜드의 기자들이 이렇게까지 소식에 빠르고 또 열심히 일하는 줄은 몰랐다.
“이럴 수가! 제가 부른 게 아닙니다. 정말이에요!”
콘스탄틴이 급하게 해명했다.
이혁을 보고 기자들이 빠르게 그에게로 달려왔다. 그들은 모두 마이크를 이혁의 입가에 들이댔다. 그러면서 일제히 뭐라고 말을 하는데,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시에 말을 쏟아내자 누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혁은 눈을 감았다. 그가 갑자기 소리쳤다.
“조용히! 모두 조용히 하세요!”
그의 커다란 목소리에 기자들이 모두 놀랐다. 본래 시끄러운 경기장에서 경기를 지휘하는 게 축구 감독이라 마음먹고 소리를 지르면 이 정도는 기본이었다.
“여긴 병원입니다. 병원에서 이렇게 소란을 피우다니, 무슨 생각들이시죠?”
이혁은 기자들을 나무란 뒤 말했다.
“저 때문에 여기 오신 것 같으니 만약 질문이 있다면, 한 명씩 하시기 바랍니다. 전 시간이 많지 않고 또 민감한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을 거라고 미리 말해두죠.”
이혁은 말을 마친 뒤, 시계를 봤다.
“십오 분 동안만 질문을 받겠습니다.”
그는 어느새 이 현장을 주도하고 있었다. BBC의 기자가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로니 감독님, 어제 심판에 대해 평가하셨던 것, 거기에 대해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지금 축구협회에선 감독님의 발언에 대한 대응을 고려 중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했던 말을 번복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혁은 숨을 고른 뒤,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방송국으로 돌아가서 어제의 경기 영상을 다시 한 번 보세요. 그리고 본인의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세요. 정말 그 판정이 문제가 없었는가? 물론 어떤 사람은 돈도, 권력도 없는 저희 팀이라면 그런 판정을 받아도 된다고 하겠지만…….”
이 말은 기자들에게 한 차례 동요를 불러왔다. 축구협회는 빅마켓 팀을 편애한다. 이를 암시하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꼭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일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기자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특종이다!’
앞으로 며칠간은 이로 인해 상당히 재미있어질 것이다. 감독이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인지 무슨 깊은 뜻이 있어 저러는 건지는 몰라도 어쨌든 작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킬 발언임은 분명했다.
기자들의 반응을 보며 이혁은 입을 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질문을 받지 않겠습니다. 다음 질문?”
“안녕하세요 로니 감독님. 전 노팅엄 일보의 기자입니다. 5일 전, 1월 1일 경기에서 노팅엄 포레스트의 선수인 데이비드 존스와 크게 부딪혀 기절했었던 것으로 아는데, 여기 온 것이 혹시 그날 일과 관계가 있는 건 아닙니까?”
질문을 다 들은 이혁은 콘스탄틴 교수에게 가서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교수님, 당신이 나설 차례군요. 쓸데없는 말 좀 많이 해주세요. 십오 분이 다 지나가게 말이에요.”
콘스탄틴은 헛기침을 한 뒤, 강의를 하듯이 기자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게 사실은…….”
10분쯤 지나고, 기자들은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콘스탄틴은 요지를 말하기 시작했다.
“……결론은 로니 감독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혁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그는 기자들에게 말했다.
“시간이 다 됐군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기자들은 순순히 그를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또 한 사람이 그를 불러 세웠다.
“로니 감독님! 웨스트햄의 로드 글렌 감독의 말에 따르면 경기가 끝난 뒤, 웨스트햄에게 아주 안 좋은 말을 하셨다던데. 웨스트햄이 곧 강등당할 것이라고 하셨다고……. 진짜입니까?”
“그럴 리가요. 잘못 들으셨겠죠. 전 그들의 승리를 기원하며 쭉 프리미어 리그에 남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마침 병원 입구에 택시 한 대가 서 있었다. 이혁은 사람들을 헤치고 빠르게 그쪽으로 다가가 차에 탔다. 택시는 바로 출발했다.
운 좋게도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택시 기사가 그에게 물었다.
“로니 감독님,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택시 기사도 자기를 알고 있다니, 의아했지만 그의 옆자리에 오늘 네 번째로 보는 그 신문이 있는 것을 보고는 바로 납득했다. 그와 동시에 기자들을 부른 사람이 리스 부인이라는 사실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경계하며 택시 기사에게 물었다.
“당신은 노츠 카운티의 팬인가요?”
“저희 집은 할아버지 때부터 노팅엄 포레스트의 팬이었죠.”
기사는 백미러 아래에 달린 빨간 유니폼 장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아까 보셨다시피 그렇게 막무가내로 몰려오는 사람들은 아주 골치가 아픕니다. 알고 보니 노츠 카운티의 팬이라는 사람이 불러온 것이라는군요.”
기사는 크게 웃었다.
“어쩔 수 없죠. 서로 철천지원수인걸요.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이혁은 본래 집으로 갈 생각이었지만, 기자들이 집까지 따라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될 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데나요!”
“하지만 아무 데나라는 곳은 없는데요…….”
택시 기사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음……. 그럼 노팅엄을 한 바퀴 돌아주세요. 관광이나 해보고 싶네요.”
“좋습니다. 아, 혹시 제가 노팅엄 포레스트에 관한 질문을 해도 괜찮을까요?”
이혁은 창문 밖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민감하지 않은 것이라면요.”
* * *
이혁은 노팅엄 시내를 한 바퀴 돈 후, 택시에서 내렸다. 택시비를 지불했지만 기사는 그가 내미는 돈을 받지 않았다.
“감독님, 만약 노팅엄 포레스트가 어제와 같은 경기를 계속 펼치기만 한다면 앞으로 차가 필요할 때마다 저에게 전화를 하십시오.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친 뒤, 그 자리를 떠났다. 택시가 도로로 접어드는 것을 보면서 이혁은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솟아올랐다.
대패를 하고 난 다음, 그는 번스의 술집에서 팬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았다. 하지만 어제 경기를 잘 치르고 나니 이런 일도 다 겪는 것이다.
그가 한국의 이혁이었을 시절, 사람들은 별로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가 무슨 일을 하건 간에 인정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로니가 된 지금, 사람들은 그의 카리스마 있는 리더쉽을 인정했다. 심지어 누군가는 그를 존경한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것은 이혁의 태도와 마음가짐에도 변화를 가져다주고 있었다.
감개무량해 하는 사이, 갑자기 무언가와 부딪혀 자칫하면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길옆에 있던 소화전을 잡아 몸을 가눌 수 있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켰을 때, 그가 본 것은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검은 그림자뿐 이었다.
“조심히 좀 다니지……”
그는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그때 지갑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런 젠장! 소매치기한테 당하다니!”
이혁은 큰 소리로 욕을 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운수가 사나운 날 같았다. 지갑에는 많은 현금과 신용카드, 그리고 신분증이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