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야간타임
소목등은 멀어져가는 시우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일 년만 쉬고 올게.”
소목등은 시우가 떠나기 전에 남긴 말을 되뇌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늘에서 눈발이 흩날렸다. 그와 동시에 소목등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왠지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추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눈이 오네.”
정처 없이 발길을 옮기던 시우는 떨어지는 눈을 보며 심호흡을 했다. 익숙했던 일들을 다시 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아직 실감은 안 나.”
그는 긴 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한적한 도로를 따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발이 점점 더 거세졌다. 아무래도 잠시 쉴 곳을 찾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본 시우는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피시방을 발견했다.
* * *
“어서오세요.”
시우가 들어온 피시방은 규모가 꽤 큰 편이었다.
자리를 찾아 앉은 시우는 바로 옆자리에서 게임 ‘글로리’를 플레이 하는 여자를 힐끗 보았다.
그녀가 격렬하게 몸을 움직일 때마다, 높게 묶은 포니테일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 정도로 살기를 뿜어대는데, 아쉽게 됐네.’
인상을 잔뜩 찡그린 그녀의 옆모습을 보던 시우는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곤 속으로 혀를 찼다.
그녀의 캐릭터는 얼마안가 죽을 것이다.
역시나 그녀가 빈틈을 보이자마자, 상대는 이를 놓치고 않고 매섭게 찔러 들어왔다. 상대의 공격에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생명력은 바로 바닥을 드러냈다.
“에이씨, 짜증 나!”
거칠게 마우스를 내팽개친 그녀는 바로 게임을 종료해 버리고는 자리를 떠났다.
시우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아, 진짜. 52전 52패가 뭐야.”
피시방을 청소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던 진과는 자신의 전적을 생각하자 매우 암울했다.
그녀의 캐릭터 ‘축연하’는 꽤나 강한 편이었고, 그녀의 실력도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지만 방금 그녀와 마주했던 상대는 너무 강했다.
“사장님! 게임 로그아웃은 했어요? 누가 지금 플레이하는데?”
이제 막 과자들을 정리하려던 찰나, 누군가 진과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피시방의 단골손님이었다.
이런!
진과는 바로 자신이 조금 전에 앉았던 자리를 향해 뛰어갔다.
‘글로리’는 ID카드를 접속기에 끼워 로그인을 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때문에 글로리 유저들은 피시방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이 게임에 접속할 때에는 카드를 잘 챙겨야 했다.
카드 하나당 캐릭 하나, 만약 카드를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캐릭을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주의를 해도 카드를 잃어버리는 사람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아이씨, 그깟 52연패가 뭐라고, 카드를 안 챙긴 거야!’
진과는 빠르게 걸어가며 생각했다. 그 무슨 일이 있어도 ID카드를 반드시 챙기는 그녀였지만, 52연패의 충격에 실수를 하고 말았다.
자신이 사용했던 자리로 돌아온 진과는 자신의 캐릭을 조종하는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야!”
진과가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스크린 위에 커다란 글자가 떠올랐다.
[승리]
‘승리……라고? 이겼어?’
스크린에 밟게 빛나는 두 글자는 진과를 그 자리에 멈춰 서게 만들었다.
‘내가 자리를 뜬지 얼마나 지났지? 1분도 채 안 된 것 같은데.’
진과는 황급히 자신의 손목시계를 쳐다봤다.
얼마나 지났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1분 남짓한 시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그 놈을 꺾어버렸다고? 뭐야 진짜 대단하잖아!’
진과는 너무 놀라워 자신의 카드를 되찾아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플레이를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그 사람은 그대로 게임을 꺼버렸다. 아무래도 게임엔 더 이상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어?”
주위를 둘러보던 시우는 진과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황급히 해명했다.
“아, 그게. 이미 게임이 시작 됐길래……. 그래도 걱정 말아요! 이겼으니까요!”
“얼마나 걸렸어요?”
진과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한 40초 정도?”
“와…….”
진과는 입을 크게 벌렸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 있는 사람은 매우 아쉽다는 목소리로 다시 말을 했다.
“손이 얼어서…… 그것만 아니었으면 30초면 끝낼 수 있었어요.”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시우의 말에 진과는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30초? 고작 30초로 나를 52번이나 이긴 사람을 꺾을 수 있다고? 대체 이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이지? 설마 글로리의 랭커인가?’
진과는 순간 자신의 피시방에서 지아스 구단이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녀가 프로게이머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비밀스럽기로 유명한 예치우만 아니라면 말이다.
예치우, 진과는 이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었다. 이내 자신의 우상인 예치우가 다소 소극적인 사람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물어보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잠시 망설이던 진과는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빠르게 카운터로 달려갔다.
“C구역 47번 손님 이름이 뭐야?”
“예시우요.”
“예시우…… 예치우? 역시!”
진과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분명했다. 그가 예치우라면 조금 전의 그 실력도 충분히 설명 가능했다. 만약 그가 예치우라는 본명을 말했다면 오히려 믿지 못했을 것이다.
“후후.”
진과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싸인을 받을만한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예치우의 싸인이라니!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한참 머리를 굴리는 그녀에게 카운터의 직원이 말을 걸었다.
“신분증을 놓고 가셨더라고요.”
“신분증? 이리 줘 봐.”
진과는 그제야 자신이 매우 흥분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피시방은 실명제이며, 신분증을 내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가명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신분증? 어디 봐봐.”
진과는 직원에게서 신분증을 건네받았다. 신분증에는 예시우라는 이름이 확실하게 찍혀 있었다. 순식간에 실망감이 밀려왔다. 진과는 이 신분증의 이름을 예치우로 바꾸고 싶다는 충동마저 들었다.
상대는 자신이 흠모하던 그 프로게이머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진과는 이 사람의 실력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다. 물론, 아까처럼 열정적인 호기심이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진과는 천천히 C구역 47번으로 걸어가 신분증을 시우에게 건넸다.
“신분증을 놓고 가셨어요.”
“아, 감사합니다.”
시우가 다급히 신분증을 받아 들며 물었다.
“여기 직원이신가 봐요?”
“아, 제가 사장이에요.”
“아! 사장님이시구나! 잘됐네요. 안 그래도 아르바이트생을 구하고 있다는 공고를 막 본 참인데, 아직 구하는 중인가요?”
“아, 뭐…… 그렇죠.”
진과는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래도 이 사람과 한번 얘기를 해보고 싶던 참이었는데, 꽤나 좋은 핑계거리가 생겨서 다행이었다.
“하하, 여기 대우도 좋은 것 같고 일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저는 어떠세요?”
시우의 밝은 웃음을 본 진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음……, ‘글로리’에서 날 이기면 고용해주죠.”
“네? 그런 조건이 있었나요?”
시우는 몸을 돌려 다시 고용조건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내가 방금 추가한 거니까 찾아봐도 없어요.”
진과가 시우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아…….”
얼이 빠진 시우는 그제야 자신이 너무 간단하게 상대를 꺾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아무래도 이 사장님은 자신의 실력에 대해 호기심이 생긴 것이리라.
시우는 그녀의 제안에 흔쾌히 응하고 싶었지만,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 사장님을 이길 수 없어요.”
“왜죠?”
진과는 크게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게 사실은 사장님 캐릭을 이길 수 있을만한 캐릭이 없어요.”
시우의 목소리에는 먹먹함이 가득했다.
“몇 레벨인데요? 장비는요?”
“없어요. 아무것도.”
“설마…….”
진과는 믿을 수 없었다.
40초 만에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꺾은 사람이 캐릭도 없다니!
‘이 사람 나한테 장난치는 거야? 초보자가 그런 수준은 말도 안 되는데.’
의아함이 가득한 진과의 얼굴을 보던 시우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 내가 하던 건 다른 사람에게 줬어요.”
“아, 그렇구나……. 통이 크네요?”
진과가 감탄하며 말했다. 이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분명 그 캐릭도 평범치 않았을 터였다.
“그러게요, 너무 통이 컸죠.”
시우는 ‘일엽지추’를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그럼 이제 새로운 서버로 넘어갈 준비를 하시나 봐요.”
“새로운 서버요?”
진과의 말에 시우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진과가 피시방 한쪽에 걸린 포스터를 가리켰다.
“아……!”
시우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일이 바로 ‘글로리’ 10주년이 되는 날이었던 것이다.
‘글로리’는 매년 오픈 기념일 때마다 새벽 00시에 새로운 서버를 열었다. 구 서버가 마음에 들지 않는 유저들, 그리고 처음 ‘글로리’를 하려는 신규 유저들은 이 날만을 기다렸다.
‘내일 열 번째 서버가 열리는 날이구나.’
몇 시간 뒤에 열리는 서버는 시우가 ‘일엽지추’를 플레이하던 전 서버와 비교하자면 까마득한 초보 서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시우는 왠지 마음이 두근거렸다.
시우는 주머니를 뒤져 ID카드를 꺼내들고는 황급히 자리에 앉았다.
‘글로리’ 서버 이전 신청 화면이 켜지고, 시우의 손놀림은 빨라졌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진과는 매우 놀란 표정으로 그의 카드를 바라봤다.
“그거 초창기에 나왔던 카드 아니에요?”
“네, 맞아요.”
시우가 뒤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시우의 카드는 무려 9년 전에 발급된 골동품이었다.
그것을 아직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니, 시우는 ‘글로리’를 매우 오래 플레이한 것 같았다.
진과는 오묘한 표정으로 시우를 쳐다봤다.
“대체 글로리를 얼마나 오래 한 거예요?”
“거의 10년 정도네요.”
시우는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했다.
진과는 ‘글로리’를 약 5년 동안이나 플레이 했었다. 이 정도만 해도 꽤나 오래한 축에 들었지만, 그녀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녀의 두 배 이상을 ‘글로리’에 쏟아 부었다.
‘10년이나 했으면서 신규 서버에 관심을 보이다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네.’
말을 하는 사이, 시우의 화면에는 ‘신규서버 등록 완료’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됐다.”
시우는 컴퓨터에 꽂혀 있는 카드를 회수한 뒤, 손에 꼭 쥐었다.
이 카드는 ‘일엽지추’ 못지않게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카드가 될 것이었다.
“여기서 일을 하고 싶다고 했죠?”
갑자기 진과가 시우에게 물었다.
“아, 네.”
ID카드를 바라보던 시우는 이내 카드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급하게 대답했다.
“어느 시간대로 생각하고 있어요?”
“야간타임이요.”
“오, 정말요?”
진과는 의외의 대답에 눈썹을 움찔했다.
매일 저녁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 담당하는 야간타임은 다른 시간대보다 시급이 훨씬 더 많았지만, 낮과 밤이 바뀐다는 단점에 야간타임으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야간타임이라…….”
진과는 다시 한 번 그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최소 보름은 정리하지 않은 머리와 거뭇하게 올라온 수염, 다소 창백한 얼굴에 탁한 눈빛은 어느 누가 보아도 오랫동안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폐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썩 맘에 들진 않았지만, 모두가 힘들어 하는 야간 시간대의 전담 직원이 생기는 것은 매우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진과는 턱을 괴고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여기서 일해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시우는 큰 목소리로 진과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오늘부터 바로 일하는 걸로 할까요?”
“네.”
“따라와요.”
진과는 시우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그를 직원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이거를 2층으로.”
“네.”
1층으로 내려온 시우는 진과의 지시에 따라 갓 들여온 새 키보드를 2층으로 나르며 피시방을 둘러보았다.
진과가 운영하는 피시방 ‘딜라이트’는 1층과 2층을 사용하는 꽤나 규모 있는 피시방이었다. 2층은 1층보다 비교적 공간이 작았지만, VIP 구역이 있는 아주 고급스러운 공간이었다.
‘저쪽이 내가 지낼 방인가?’
시우는 키보드를 2층에 위치한 창고로 옮기며, 그 안쪽에 있는 방들을 확인했다.
이제 막 구단을 떠난 시우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조차 잡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숙식을 제공하겠다는 공고를 보았고, 시우는 이곳에서 일할 수만 있다면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깨끗하고 좋네.’
시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 방을 둘러보았다.
“저기, 일 끝났으면 이리와요. 앞으로 지낼 곳을 보여줄게요.”
진과는 일을 끝낸 시우를 데리고 창고 가장 구석에 있는 작은 침대로 다가갔다.
“이곳에서 지내면 돼요.”
“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시우가 주춤 물러섰다.
바깥쪽의 깨끗하고 환한 방이 아니라……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가로등불이 환하게 비추는 이 더러운 침대가 시우의 숙소였다.
“음, 좀 그런가? 사실 야간알바를 급하게 뽑을 필요는 없어서……. 뭐, 싫다면 지금이라도 가도 돼요.”
진과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아닙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죠! 하하.”
시우는 바로 표정을 바꾸고는 침대를 팡팡 쳤다. 비록 이 작은 공간이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라고 느껴져도 그에게는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그럼 다행이고. 참! 다른 일 없을 땐 내려가서 게임해도 돼. 우리 직원들한테는 돈을 받지 않으니까.”
어느새 진과는 시우를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시우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진과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때, 적응도 할 겸 가게 좀 둘러볼래? 출출하니 야식도 좀 먹으면서…….”
“네? 뭘 먹는다고요?”
시우는 깜짝 놀란 얼굴로 진과를 바라보았다.
“왜? 뭘 그렇게 놀라! 원래 이 시간에 배고프지 않아? 길 건너편에 작은 밥집이 있으니까 일단 거기에서 먹을 것 좀 사와. 아 참, 난 셀러리는 안 먹는다~”
진과는 시우의 손에 몇 만 원을 쥐어주며 등을 떠밀었다.
“지금 밖에 눈 오는데요?”
“길 건너편이잖아. 멀지 않으니까 빨리 갔다 와!”
시우는 적지 않게 당황한 모습이었지만, 진과는 그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와…….”
진과의 재촉에 눈보라가 치는 밖으로 쫓겨난 시우는 어쩔 수 없이 야식을 사러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일을 시작하자마자 착취당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리 우울하진 않았다.
아무래도 그의 새로운 사장님은 사람을 금방 편하게 대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여기까지 생각한 시우는 순간 자신이 아직 사장님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