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데일리 퀘스트
파르르, 이안의 속눈썹이 떨리며 서서히 눈꺼풀이 올라갔다.
이안은 흐릿한 시야를 되찾았지만, 머리가 묵직하고 여기저기 온몸이 쑤셨다. 차츰 몸을 일으킨 그는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조심히 머리를 만져봤다.
‘머리가 왜 이렇게 아프지?’
너무도 당혹스러웠다. 이안은 방금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를 이리저리 다 만져보던 그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진 안경을 주워 들었다. 안경알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만, 이안은 습관처럼 안경을 얼굴 위로 걸쳤다. 그런데 왜일까, 방향감각도 둔하고 눈앞이 희끄무레했다.
이안은 안경을 다시 벗고서야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시야는 안경을 썼을 때 더 흐릿하게 보이고 있었다.
“와…….”
이안은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재빨리 책상으로 달려가 연필을 움켜잡았다.
벽에 글자 ‘A’를 적고 얼른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계속 뒤로만 가다 보니 어느새 이안은 반대편 벽에 닿았다.
그래도 A는 여전히 아주 선명하고 또렷하게 보였다.
“진짜……? 어떻게???!!!”
이안은 충격에 말까지 더듬었다.
태어날 때부터 시력이 나빴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다 또렷했다.
서둘러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는데, 별안간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 전에 벌어진 장면이 섬광처럼 번뜩이며 떠올랐다.
그때를 반추할수록 더 또렷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 책!
이안은 책을 찾으려 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다시 공황에 빠졌다. 책이 사라진 것이었다.
“내 책! 이 빌어먹을! 책이 어디로 간 거야!”
먼지 하나까지 뒤적여도 책은 나올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마땅히 숨을 공간도 없는 조그만 방에, 책이 사라졌다는 건 당최 말이 되질 않았다.
“이 망할 놈의 종이 쪼가리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이안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묻어나왔다.
순간 머릿속엔 시선이 닿지 않는 방 한쪽 구석에 숨어 웃고 있는 책의 모습이 떠올랐다. 왠지 매우 안타까워하는 자신을 비웃고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지? 양말을 생각해봐. 양말도 맨날 이 조그만 방에서 잃어버리잖아. 아니지, 아니지……. 하……, 이 멍청아! 지금 책이랑 양말이랑 같아?”
이안은 답답함에 점점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곤, 쓰러지기 직전의 일들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다 불현듯 공중에서 배회하던 책이 떠올랐다. 눈감기 직전 분명 무슨 말이 들렸었는데…….
“그게 뭐였지? 무슨 시스템 메시지였나?”
이안이 그 말을 내뱉기 무섭게, 한 메시지 창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다.
[사용자: 이안 탈렌]
[종족: 인간]
[레벨 1]
[경험치 0/100]
[HP 10/10]
[힘: 10]
[민첩성: 10]
[체력: 10]
“와…….”
이안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건……. 마치 외계생명체 침공으로 지구가 위험에 빠지지 않은 그 시절, 옛날 사람들이 즐겨한 오래된 게임처럼 보였다.
이안은 그 상태 창 상단에서 더 많은 탭들을 발견했다. 그냥 머릿속으로 읽기만 해도 눈앞의 화면은 자동으로 [스킬] 탭으로 전환됐다.
[스킬]
[이용 가능한 스킬 포인트: 0]
[해제되지 않은 스킬 ????]
[해제되지 않은 스킬 ????]
…….
많이 이상하긴 했지만, 이안은 일단 장단을 맞추기로 했다. 오로지 순수한 호기심이 발동한 까닭이었다. 그만큼 이안은 학교에서도, 일상에서도 늘 친구 하나 없이 외로운 소년이었다.
스킬 탭에서 이안이 볼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모든 설정이 아직 다 잠긴 상태로 활성화가 되지 않은 듯했다.
[상점]
[레벨 10 잠금 해제]
빠르게 다음 탭으로 이동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아……, 뭐 할 수 있는 게 있긴 한 거야?”
이안이 의심스럽게 중얼거리다 마지막 탭으로 이동했다. 마지막은 [퀘스트], 드디어 특별한 요구사항으로 잠기지 않은 탭이었다.
[메인 퀘스트]
[레벨 10 달성하기]
[데일리 퀘스트: 물 2L 마시기]
[보상: 경험치 5]
시스템 화면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다 샅샅이 훑어본 후, 이안은 이제 시스템을 꺼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정말 화면이 자취를 감췄다.
이안은 잠시 눈을 깜빡이다, 다시 시스템 창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해봤다. 역시 눈앞엔 다시 또 그 화면이 나타났다.
순간 이안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만약 부모님이 남긴 그 책이 어빌리티 북이라면……? 그럼 자신에게 벌어진 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어빌리티 북은 군대나 기업에서 종종 상당한 고가로 판매되는 책이었다. 그중 일부는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일 때도 있었다.
이안은 어빌리티 북을 실제로 보진 못했지만, 말도 한번 섞어본 적 없는 학교 아이들이 저들끼리 속닥거리는 걸 들어보기는 했었다.
하지만 이처럼 사용자에게 어떤 시스템만 제공하고 즉시 사라져 버리는 어빌리티 북이 있다곤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했다.
어빌리티 북은 본래 사용자가 몸으로 겪어가며 익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결코 누군가 책을 집어 들기만 해도 즉각적으로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게다가 생각만으로 화면을 눈앞에 떠올릴 수 있는 능력이라니……. 더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곧 이안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건 그에게 분명 좋은 소식이었다. 어떤 어빌리티 북도 살만한 형편이 아니었기에 이안은 레벨 1 능력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도 비로소 이제 쓸만한 뭔가를 가진 것이었다.
이안은 제게 주어진 선택지들을 가리기 위해 머리를 바삐 굴렸다. 연마할 수 있는 게 생겼으니,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에 들뜨는 마음도 있었다. 진작 이 책이 있었다면 많은 도움이 됐을 거란 아쉬움은 고이 접기로 했다.
이안은 곧 오른쪽 손바닥을 들어 주방 싱크대를 향해 쭉 뻗으며 외쳤다.
“움직여라, 물!”
이젠 수도꼭지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겠지?
…….
공기도 머쓱한 듯 주춤주춤 지나가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건 됐고, 그럼 다음! 바람 나와라, 바람!”
아까와 똑같은 동작을 취해봤지만, 똑같은 적막만 흐를 뿐이었다.
이안은 그 후로도 지금껏 한 번이라도 보고 들은 적이 있던 모든 능력을 떠올려 시도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괜스레 자신의 무능력만 확인하고 침대로 다가가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뭐 이리 쓸모없는 게 다 있어? 그냥 시스템 창만 보는 게 전부인가?”
이안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만일 이게 실제 게임이라면, 퀘스트만 완수한다면 점점 더 강해지고 사용할 수 있는 스킬도 더 많아질 터였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이런 게임을 해본 경험이 있는 부모님들 이야기를 듣고 신나게 떠들어대던 걸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몇몇은 아직 그런 종류의 게임을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물론 골동품으로 집 한구석에 잠자는 것이지만.
어쩌면 이 책을 그저 흔한 어빌리티 북으로 치부한 게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무엇으로 봐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책 아니던가. 여전히 책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고, 어빌리티 북은 어딘가로 홀연히 사라지는 물건도 아니었다.
어빌리티 북은 대개 한 능력을 기반으로 한다. 보통 인간은 일생에 걸쳐 한 가지 속성의 능력만 사용할 수 있기에 첫 어빌리티 북은 매우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만약 최초의 능력을 변환할 수 있게 되더라도 본래 가진 속성과 관련된 스킬만 습득이 가능했다. 이를테면 불의 속성을 첫 능력으로 익혔다면 오로지 불을 이용하는 스킬들을 모으는 일에 전념해야만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어딘가 달라도 달랐다. 이안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어느 어빌리티북이 시력까지 완벽하게 만들어 줄 수 있겠는가?
이안은 방에 놓인 작은 냉장고를 열고 물병들을 손안에 그러쥐었다. 그리곤 물들을 하나씩 차례로 마시기 시작했다.
“젠장! 2L면 대체 얼마지? 물배 터지겠네!”
이안이 4번째 병을 비웠을 때, 눈앞에 화면이 불쑥 나타났다. 창에는 새로운 알림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데일리 퀘스트 완료, 경험치 5를 획득했습니다.]
[5/100]
“흠, 그나마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조금 알 것 같군.”
이안도 만족한 얼굴이었다.
그때였다. 시끄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를 때리기 시작했다.
이안은 너무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튀어 올랐고, 쥐고 있던 빈 물병도 바닥에 내동댕이칠 뻔했다.
똑똑-
다시 노크 소리가 이어졌다.
이런 식으로 찾아와 문을 두드릴 사람들이라면……. 군인 뿐이었다.
이안이 황급히 달려가 문을 열자, 엄청난 덩치에 근육질 몸을 자랑하는 한 대머리 남성이 서 있었다.
그가 입은 검은 군복엔 대지를 상징하는 능력 속성도 새겨져 있었다. 더불어 여러 개의 훈장과 오른쪽 위 가슴엔 그의 이름이 묵직하게 들어왔다.
「병장, 그리프.」
“이 시간 이후 즉각 방을 비운다. 차량은 이미 5분째 밖에서 대기 중이다.”
정신없이 일이 터진 까닭에 이안은 오늘이 집에서 나가야 하는 날이라는 사실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군사학교로 가야 할 시간이다.”
이안의 행보를 알리는 그리프의 진중한 음성이 이어졌다.
인류와 달키 사이의 전쟁으로 모든 시민은 2년간 군사학교를 다녔다.
평화협정이 이뤄졌지만, 이 무탈한 시기가 영원하리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달키족 자체가 원래 믿을만한 종족이 못되었다. 그들은 항상 힘을 갈망했고, 자신의 종족보다 열등한 생명체를 지배하려는 욕망이 강했다. 그러한 욕구는 그리 쉬이 억누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뉴스에서도 날마다 두 종족이 서로를 적대하며 전쟁 촉발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같은 목소리를 반복했다. 시민들은 금방이라도 시작될 참사에 대한 공포로 날마다 불안에 떨었다.
이안은 그리프를 따라나서기 직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갔다.
2L나 되는 물을 마셨는데 괜찮을 리가 있겠는가.
* * *
이안이 방 밖으로 발을 내딛던 순간, 매우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바깥세상 아래, 눈앞엔 알림 창 하나가 새롭게 나타났다.
[신체가 직사광선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햇빛으로 인한 데미지를 입습니다.]
[햇빛에 노출되는 동안 모든 능력치가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이안은 갑자기 몸이 극도로 나른해졌다. 꼭 마라톤 종주를 마치고 난 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랄까. 팔다리가 천근만근처럼 무거워졌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이안은 문득 멈춰 서 서둘러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고, 그리프 병장은 문밖에 발을 내딛자마자 바위처럼 굳어버린 이안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괜찮은가?”
그리프는 여차하면 이안이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본래 매년 따라오길 거부하는 자들이 연례 행사처럼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이안은 현재 그리프의 말이 들리질 않았다. 그리프의 걱정처럼 자신의 의무를 저버릴 생각도 없었다. 그냥 제 앞에 떠 있는 화면에서 감소한 능력치를 확인하느라 정신없을 뿐이었다.
[HP 5/5]
[힘 5/5]
[체력 5/5]
[민첩성 5/5]
떨어진 건 능력치만이 아니었다. HP마저 대폭 줄어들어 있었다.
‘무슨 약점이 이래?’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더는 방에 혼자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안?”
그리프가 다시금 이안을 불렀지만, 이안은 하염없이 화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또 다른 알림이 떠올랐다.
[새로운 퀘스트를 받았습니다.]
[데일리 퀘스트: 8시간 동안 직사광선 피하기]
[보상: 경험치 5]
새로운 퀘스트를 보는 순간, 이안은 다시 또 들떴다. 물 마시기와는 다르게 그냥 잠만 자도 완료할 수 있는 퀘스트였다.
이 시스템이 이안이 전에 들었던 그 게임들과 같은 방식으로 굴러간다면 경험치를 100까지 채우는 순간 레벨업을 하며, 능력치도 함께 올라갈 것이다. 그럼 퀘스트를 많이 수행할수록 분명 좋은 일이었다.
“정신 차리고 빨리빨리 움직이지 못해? 이런 식으로 군사학교에서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멍하게 서 있던 이안의 귓가로 그리프의 날카로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