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ebNovel
1. 그저 오래된 책 한 권에서
“주제도 모르고 나대다 죽어버리지나 말라고, 이안!”
텅 빈 복도에 한 소년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귓가를 때리는 자지러질듯한 웃음소리……. 이안은 복도를 따라 꿋꿋이 걸으며 그 비아냥을 떨치려 애썼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이건만, 조롱은 조금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이안 역시 똑같이 되돌려주고 싶은 이 분노를 도저히 떨칠 수가 없었다.
이안은 보폭을 서서히 줄이다 결국 중간에 멈춰 섰다.
덩달아 안경이 툭, 흘러내려 이안은 다시 콧마루까지 안경을 밀어 올렸다.
그냥 슬쩍 스쳐만 봐도 잔뜩 낡아버린 안경은 이리저리 뒤틀리고, 다리도 테이프로 칭칭, 아무렇게나 감겨 있어 새 안경이 필요해 보였다.
이안은 그래도 그 안경을 꿋꿋이 고쳐 쓰고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곤 근거 없이 자신을 헐뜯던 그 소년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너야말로 지금 내가 손가락을 몇 개나 펴고 있는지도 모르잖아?”
이안이 야멸차게 쏘아붙이기 무섭게 소년은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려들었다.
“이 레벨 1밖에 안 되는 찌질이가! 여긴 너 따위가 얼쩡대는 곳이 아니야! 대체 언제쯤 정신 차릴 거냐?”
그리고 소년이 두 손을 한데 모으자 손바닥 사이로 녹색 빛 동그란 공이 만들어졌다. 이제 이안과 소년 사이 거리는 고작 몇 발자국, 소년이 손을 내던지듯 힘차게 앞으로 뻗자 초록빛이 강렬하게 쏟아져 나갔다.
이안은 일순간 궁지에 몰렸다. 너무도 빠른 속도로 날아드는 빛줄기를 피할 겨를도 없었다. 그럼 남은 방법은 그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내는 것뿐이었다.
소년의 빛은 이안을 정통으로 가격했고, 이안의 몸은 이내 하늘 높이 붕, 떠올랐다가 눈 깜짝할 사이 저 먼 복도 끝 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뭐야? 뭐야? 무슨 일이야?”
삽시간에 구름처럼 군중이 몰려들고, 한 학생이 분주하게 물었다.
“무슨 마지막 날 싸우고 있는 거야?”
소란을 궁금해하는 아이들은 금세 거대한 무리를 형성했다.
그러던 중, 한 여학생이 무너진 벽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아마도 공격을 당한 누군가가 무사한지 살펴보려는 행동인 듯했다.
희뿌연 먼지가 가라앉고, 이안의 검은 반곱슬머리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이 자욱한 연기가 걷히고 나서야 여학생도 마침내 그 곱슬머리의 주인공을 알아차렸다. 그러자 소녀는 반사적으로 튕기듯 물러나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소녀가 무리에 합류하기 무섭게 친구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물론 이안도 그 모습을 고스란히 다 목격했다.
“너 저 녀석을 도와주려 했어? 진짜 어이가 없다.”
“누군지 몰랐단 말이야!”
여학생은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며 반박했다.
이안은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천천히 일어나 바닥에 나동그라진 안경을 집어 들었다. 아……. 안경테가 또 떨어져 나가버렸다.
살짝 한숨을 쉰 이안은 이미 다 닳고 닳아버린 안경을 그저 손에 꽉 쥔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제기랄, 또 이러다니…….”
오늘은 이 학교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었다. 이안은 오늘만큼은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아이가 없기를 바랐다. 졸렬한 짓거리들에 이골이 날 대로 났지만, 이안은 그걸 또 무시할만한 성격도 못되었다.
이안도 최대한 이목을 끌지 않고 괴롭힘을 견딘 사람들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안보다 훨씬 더 끔찍한 대우를 받았을 뿐이었다.
곳곳에 쉽게 교정을 떠나지 못하는 학생들의 서성임이 잦았다. 삼삼오오 무리 지어 이야기꽃을 피우는 학생들도 많았고, 앞으로 다신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웃고, 우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안은 기쁜 쪽에도, 슬픈 쪽에도,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이방인이었다. 이안 역시 어느 무리에 낄 생각도 없었고, 이 학교에 더는 남아 있고 싶지도 않았다. 이안은 그렇게 미련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패거리들도 이안을 반길 일은 없을 것이다. 이안은 이곳에서 철저한 괴짜로만 머물다 떠나는 사람이었다.
* * *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안은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그의 집은 침실 하나가 딸린 아파트로, 일가친척조차 없는 혈혈단신 16살 소년에게 정부가 제공한 아파트였다. 1인용 침대와 책상만 들어갈 공간, 짐도 침대 머리맡에 놓인 여행 가방에 든 것이 전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안은 곧장 수납장 쪽으로 걸어가 서랍을 열었다. 그곳엔 대략 0.5kg 정도 나가는 크고 묵직한 양장본 책이 들어 있었다.
겉표지는 옅고 붉은 핏빛, 그 표지 가운데엔 웬 상악골과 하악골이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눅눅한 갈색빛의 그것은 일종의 송곳니로 네 이빨이 각각 따로 떨어져 위턱뼈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아래턱뼈 양 끝으론 날카로운 이빨 2개가 위로 높이 솟아 있었는데, 그 안쪽엔 5개의 이빨이 서로 같은 간격을 두고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 다시 해보는 거야.”
이안은 책상 위에 그 책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리곤 가방에서 잽싸게 무색 액체가 반쯤 담긴 작은 시험관을 꺼냈다.
“112번째 실험, 염산. 어디 염산에는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아볼까?”
이안이 시험관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액체를 천천히 책 위로 부었다.
“아직까진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고 있음.”
하지만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떨어트려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이안은 실험 결과를 공책에 필기하며 신중히 책을 살폈다. 혹시 염산으로 훼손된 부분이 있나 확인해봤지만, 책은 원래 모습 그대로였다.
“아……, 또 실패야! 대체 왜 안 열리는 건데! 엄마, 아빠는 애초에 왜 이런 책을 갖고 계셨던 거야?”
100번하고도 12번. 지금껏 이안이 이 책을 펼치려 애썼던 횟수였다.
그간 책은 열리는 건 고사하고 손상하나 가지 않았다. 이안은 이 책을 불태우고, 자르고, 녹이려고까지 했으나 책은 그 어떤 것에도 반응이 없었다. 세상 무엇도 이 책을 망가트릴 수 있는 건 없는 듯했다.
그냥 이안은 침대에 드러누워 TV를 켰다. 사실 TV는 그저 적막을 달래주는 배경일 뿐, 세상이 무슨 이야기를 하건 크게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정처 없이 떠드는 이 TV 소리로 그는 조금이나마 덜 외로울 수 있었다.
TV가 켜지고, 한창 방영 중인 뉴스 보도가 흘러나왔다.
“달키 종족과의 평화협정이 5년째 지속되는 가운데, 정부 관계자들은 긴장이 다시 고조될 것이라 전망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전쟁을 치를 준비를…….”
30년 전 그날 이후, TV는 연일 전쟁에 관한 이야기만 떠들어댔다.
30년 전, 인류는 이른바 달키라 불리는 종족을 맞이했다. 그들에겐 비늘로 덮인 피부와 용의 꼬리 같은 것이 달려 있었지만, 그걸 제외하면 인간과 상당히 비슷해 보이는 종족이었다.
그들이 왜 느닷없이 지구에 나타났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렇지만 달키는 홀연히 나타나 인류의 자원과 노동력을 요구했었다. 인간을 그들의 노예로 부리려는 속셈이었다.
인류는 당연히 달키의 요구에 맞서 싸웠으나, 머지않아 달키 종족을 상대하기엔 인간의 기술은 모두 턱없이 부족함을 깨닫게 된다.
총알은 비늘로 된 그들의 피부를 뚫을 수 없었고, 탱크도 무용지물이었다. 달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우스울, 우주선이 있었다.
성별을 막론한 모두가 터전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 나서야 했다. 이안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달키와의 전쟁은 수십 년 동안 이어졌고, 이안은 부모님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 채 홀로 외로이 자라났다.
그런데 인류가 전쟁에서 패하기 직전, 특수한 능력을 지닌 자들로 엄선된 한 집단이 나타났다. 그들은 사람들과 능력을 얻을 방법을 공유하며 이것으로 전쟁의 판도가 뒤바뀌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그들이 전한 능력은 정말 달키와의 전쟁에서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래도 달키는 여전히 강했고, 끝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던 교착상태는 결국 5년 전, 평화협정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인간의 탐욕이란 무릇 인간성을 무참히 압살하는 법이었다.
정부 고위 관료들은 이 능력을 모든 인류와 공유하지 않고 그들만을 위해 남겨두기로 선택했고, 모든 건 돈의 논리로 넘겨버렸다.
돈이 있어야만 더 강한 능력을 얻을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한 이들에겐 찌꺼기처럼 남은 능력들만 주어질 뿐이었다.
전 세계가 빈곤에 허덕였으나, 그들은 자신이 가진 힘을 무분별하게만 사용했다. 전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 어떤 해결책이라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안의 부모님은 그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학교에 다니는 동안은 정부에서 생활비를 지급해줬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이안은 10살 무렵 전쟁에 나간 부모님과 영원히 작별했고, 그에게 어느 대리인이 나타나 책 한 권을 전해주었다. 부모님이 지닌 유일한 물건이었단 말과 함께.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 거지……?”
이안은 비참한 중얼거림을 잇다가, 침대를 벗어나 책상으로 걸어갔다.
안경을 좀 손볼 필요가 있었다. 안경알 하나가 살짝 어긋나 있었는데, 그는 렌즈를 다시 제자리로 돌리려 요리조리 애를 썼다.
주먹까지 동원해 쿵쿵, 때리기를 잠시, 이안도 결국 폭발하고야 말았다.
“아! 그냥 좀 들어가라고!”
안간힘을 써도 안경은 꿈쩍도 하질 않았고, 이안은 고작 이 작은 동그라미 앞에서 무력한 좌절감만 커질 뿐이었다.
렌즈는 끝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났다. 설상가상, 이안의 엄지손가락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도대체 왜 나만 이러는 건데! 나만 왜 이렇게 짓밟는 건데!”
이안은 악을 쓰며 책상을 걷어찼다. 세상은 좀처럼 제 마음대로 흘러가는 것이 없었다.
한참을 씩씩거리고 나서야 그는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
유리 조각들은 어지럽게 널려 책 위에까지 몸을 누이고 있었고, 이안은 하나둘 파편을 치우다 손가락 상처를 살짝 자극했다.
책 위의 유리를 치우는데 그 위로 피 한 방울이 톡, 떨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책 중앙에 반죽같이 붙어 있던 물체가 거짓말처럼 빛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책은 공중을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고, 이안과 눈높이를 맞추며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
이안은 잽싸게 뒷걸음질 치며 책에서 물러났다.
책이 뿜어내는 강렬한 불빛은 구석에 작은 침대 하나와 앉을 자리 하나만 있는 그의 방을 더 허전하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지?”
책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며 눈부실 정도로 환한 빛을 발했다.
그러다 책은 갑자기 입을 활짝 벌리고, 차례대로 책장을 넘겼다.
이안은 정말 뭔가에 홀린 듯했다. 저 눈부시게 빛나는 책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책은 그가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언어로 쓰여 있었지만, 무슨 까닭인지 그는 꼭 자신이 그 내용을 다 이해하고 있단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장까지 모두 다 넘어가자, 책은 점차 먼지처럼 변하며 모습을 지우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이안은 갑자기 온몸에 힘이 쭉, 빠졌고 동시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며 천천히 눈꺼풀이 감겼다.
그리고 정신을 잃기 바로 직전, 귓가에 한 메시지가 들렸다.
[승인을 축하합니다. 당신은 배…….]
결국 의식은 흐려지고, 이안은 메시지를 끝까지 다 듣지 못하고 쓰러졌다.